[아름다운 노년②] '과거를 맘껏 후회하라'...은퇴 첫걸음

임지연 승인 2024.03.22 09:44 | 최종 수정 2024.03.22 13:34 의견 0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일본 문학의 단가(하이쿠 俳句)를 연상시키는, 어느 유명 시인의 짧은 시는 긴 여운을 남긴다.

특히 은퇴를 앞둔 사람들에게 주는 울림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큰 공명으로 이어진다. “올라갈 때”가 아니라 “내려갈 때”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꿈을 향해, 정상을 향해 거침 없이 내달렸던 그 길을 뒤로 하고 맞이하는 인생의 전환점. 원한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집행되는 ‘세월의 야속함’ 앞에 몸도 마음도 힘겨워지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의 가을에도 작지만 소중한 '그 꽃'이 있다는 따뜻한 위로에 오래 오래 시선이 머무는 것은 필자뿐일까.

혈기방자하던 여름날에는 미처 몰랐던, 귀한 그 무엇이 있다고, ‘봄꽃보다 더 붉은 가을단풍’ 같은 삶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것일뿐이라는 일깨움이 한없이 값지다.

한 편의 시로 서두를 시작한 것은 ‘은퇴’라는, 당사자 누구에게나 사연 많은 주제를 꺼내기 위해서다.

올해 71세 나이로, 연금 5만엔(한화 50만원) 식비 1만엔(10만원) 전후로 생활하는 <절약생활>로 일본에서 유명한 시온 씨.

은퇴(隱退). 한자를 보면 숨을 은(隱), 물러날 퇴(退), 물러나서 숨는다는 뜻이다. 네이버 사전을 보니,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낸다는 의미로 풀이했다.

'군대가 후퇴하다'는 뜻에서 처음 시작됐다는 영어 단어 '리타이어(retire)'도 은퇴라는 말보다 쓰임새는 더 광범위하지만, 활발한 활동을 뒤로 물린다는 뜻에선 동서양의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한마디로 은퇴는 나이가 들어 특정 직업에 맞지 않다고 사회 통념상 인정된 시기에 도달했을 때 좋든 싫든 그 직업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한 때 은퇴하라는 단어는 낙향이라는 말과 겹치거나, 손주를 봐주고 여행을 하면서 삶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이미지와 오버랩됐었다. 은퇴 이후의 여생이 20년 미만으로 짧았던 탓이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야 할 시간이 더 많아진, 100세 아니 그 이상을 바라보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은퇴의 의미도 완전히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반려를 찾기 위한 사랑의 열정, 자식 부양의 절박감, 일터에서의 승진 경쟁 압박 등을 이제는 다 내려 놓고, 온전히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새로운 선택을 시작하는 삶의 단계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자세로 맞이 하느냐에 따라 젊은 시절 못지 않은 열정, 성취감, 행복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로 바꾸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해진 게 지금의 현실이다.

'절약이란 지적인 행위'라며 당당하게 아끼고 살아가자는 철학으로, 매월 6만엔(한화 60만원) 정도로 식비 & 생활비를 감당하고 있는 시온 씨의 인스타그램에는 <절약생활>기록이 빼곡하다.


인생의 '마무리'가 아니라 자연스런 삶의 '다음 단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거듭 말하지만 은퇴는 우리에게 삶을 되돌아 보는 ‘후회’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앞으로의 계획 및 희망을 재설계하게 도와주는 인생의 터닝포인트이다.

실제 지난 과거를 애석해하면서 보이는 눈물 어린 후회든, 더 나은 삶을 위한 의도적인 후회든 '과거를 맘껏 후회하라'는 정언 명령은 은퇴의 첫걸음으로 매우 유용한 가르침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하루 24시간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경험하는 은퇴를 직장인 뿐 아니라 인생에서의 포괄적 의미로서 해석하자.

인생 100세 시대, 그 중간의 어느 지점에서 일어나는 은퇴에 대해, 그것을 맞이하는 개인의 자세부터 과거와는 달라야 한다. 보험에 가입할 때도 90세까지만 보장이면, 무언가 부족한 생각이 들 만큼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장수시대에 진입해 있다. 그만큼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 내면을 채울까 고민해야 한다.

따져보니 은퇴를 한 시점, 가령 '60세 은퇴, 기대수명 80세'를 가정하면 자유시간(하루 24시간 가운데 먼저 수면 식사 등 개인 생활에 필요한 시간을 뺌)이 8만 시간이 생긴다. 기대수명을 100세로 계산하면 그 두 배인 16만 시간으로 늘어난다. 사람에 따라 생활 방식이 달라 정확한 계산이 쉽지 않지만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셈이다.

일본에서는 든든한 노후를 위한 책쓰기 추천이 유행이다. 100세 시대 플랜, 은퇴 라이프 플랜 수첩 등 다양한 노트들이 서점가에 진열되어 있고, 노후 계획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적어 책을 만들어 볼 것을 추천하는 도서들이 인기다.

일본에서는 든든한 노후를 위해 자신만의 계획을 담은 책쓰기를 권하는 도서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2014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일본 경제 주간지 ‘프레지던트’가 은퇴 대상 남여1000명에게 ‘무엇이 가장 후회가 되는지’를 질문했다.

두 가지 큰 항목으로 나눴는데, 1) <일과 인간관계> 분야의 후회는 무엇이고, 2) <돈과 생활> 분야 후회는 무엇인지 각각 물었다.

우선 ‘~~(무엇무엇)할 것을!!!’로 대표되는 <일과 인간관계> 분야 후회 5가지(톱 5)를 꼽으라고 했더니 다음과 같았다.

1. 평생 즐길 수 있는 취미

2. 부모님과 자주 만나 이야기 나누기

3. 친구를 많이 사귀기

4. 자녀와 많은 대화

5. 결혼에 대해 좀 더 신중히 결정

<돈과 생활> 분야에서 후회되는 것 5가지(톱 5)를 골라보라고 했더니 이랬다.

1. 저축을 좀 더 많이

2. 다양한 분야 공부하기

3. 가고 싶은 곳 자주 여행하기

4. 연금 생활 맞게 생활규모 줄이기

5. 퇴직 후에도 활용할 수 있는 자격증 따기

10년이 지난 시점에 은퇴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작년 12월 일본의 초고령미래관측연구소에서 60세 이상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지금 당신의 목표, 희망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은퇴 이후 희망 목표 ‘ ~ 하기’ 톱5

1. 즐길 수 있는 취미, 취미를 아마추어처럼

2. 건강 유지

3. 여행 하기

4. 일 또는 사회 참여 유지

5. 장수

먼저 1위를 차지한 취미는 지금까지 충분히 여가를 즐기지 못한 아쉬움이 후회로 남았고, 앞으로 목표로 삼아 좀 더 잘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읽힌다.

사실 취미 이외에 건강 여행 사회참여 장수 등 조사 결과가 평범하다.

하지만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을 한 번 체크해 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난 일들에 대해 ‘후회해 보기’를 해보는 것은,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목표 정하기’를 하는 것은 어쩌면 노후 준비의 시발점이 아닌가 싶다.

조사에 응답한 은퇴자의 의견을 예시로 보면

#64세 남성

“60세부터 조깅을 시작하여, 앞으로는 프로마라톤 완주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68세 여성

”정확히 우주론을 이해하기‘. 아마 수 년 걸릴지도.”

#62세 남성

“지구 일주에 해당하는 4만 킬로 걷기”

#72세 여성

“프랑스어를 배워, 샹송을 멋지게 불러 보기’

#73세 남성

”90세까지 봉사, 취미의 커뮤니티에 소속되어 활동하기“

반면에 한국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일본과는 적지않게 차이가 난다. 주로 금전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2023년 6월 미래에셋투자 연금센터에서 50세 이상 남녀 400명을 대상으로 ‘퇴직하기 전에 미리 준비 못해 가장 후회가 되는 일?” 이라는 주제로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재무관리, 일자리, 인간관계, 취미와 여가, 건강 등 분야별로 살폈는데, 이 모든 사항을 기반으로 하는 것은 재무라는 결과가 나왔다.

후회되는, ‘~~(무엇 무엇) 할 걸!!’ 톱 5

1. 개인연금에 더 많이 관심

2. 투자에 좀 더 관심

3. 퇴직하고 할 일을 미리 준비

4. 가족 친구들과 더 많은 이야기 나누기

5. 취미생활에 필요한 자금 마련

이 외에도 탈모, 치아, 피부미용 등 '외모에 좀 더 신경을 쓸 걸!'이라는 은퇴자가 11~12%가 나왔다.

또한 인간관계 조사 중 세부적으로 보면 '인맥 관리 즉 창업이나 재취업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걸!"이라는 응답이 30%가 넘었다.


한국은 노인 빈곤율이 14년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1위다.

OECD가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기준의 한국의 66세 이상 노인인구의 소득빈곤율은 40.4%로 회원국 평균보다 3배 가까이 높아, 은퇴자들은 100세까지의 노후 자금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2019년 일본에서는 100세 노후 자금은 연금 + 2억 더 필요하다는 금융청의 발표로 발칵 뒤집어졌다.

이와 같은 공식으로 계산한 결과, 조선일보가 발표했는데, 한국은 3억 3000만원이 부족한 것으로 나왔다.

그래서 일본이든 한국이든 노후를 맞이한 개인은 더욱 더 다급해진다.

일본의 인기블로그로 저연금인 ‘한달 5만엔으로 행복하게 살기로 유명한 71세 유튜버(YouTuber) 시온 씨가 보여주는 일본 가족의 풍경은 이렇다.

'74세 남편, 97세 시어머니, 46세 아들‘

그녀는 "68세부터 시작한 유튜브가 삶의 기분전환이 되는 놀이터"라고 말한다.


은퇴의 개념이 달라진만큼 어쩌면 삶을 마무리 할 때가 진정한 은퇴인지 모른다.

재취준생이 되든, 반대로 여유로운 노후계획이 있든, 은퇴를 맞이하는 분들께 라이프 플랜 수첩, 블로그, 유튜브(youtube) 중 어느 것이든 시작해 보는 것을 강력 추천한다.

인생을 밥상에 비유해 보면

밥은 경제력

반찬은 목표

밥상은 건강

수저는 플랜

라고 할 수 있다.

잘 차려진 한끼의 밥상이 우리가 원하는 삶인지도 모른다.

글: 니시야마 치나(한국명 이명지) 경희대 교수

재일교포 출신으로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천착해 온 이명지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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