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곡우(穀雨)입니다.
청명(淸明)과 입하(立夏) 사이에 있는 6번째 절기이지요. 봄이 가고 여름 날씨가 시작되는 절기인데 어제부터 일부 지방엔 30도 초여름 날씨가 보이고 있습니다.
이맘 땐 곡우바람이라고 바람이 세게 붑니다. 비도 자주 내립니다. 만물이 생동하는 이때 비가 와야 백곡이 잘 자라겠지요.
◇ 농사철 시작
곡우 절기부터 농가에선 못자리용 볍씨를 담그는 등 농사가 시작됩니다. 비가 적당히 내려야 논밭에 뿌려 놓은 씨앗이 잘 자라지요. '곡우에 가물면 땅 석자가 마른다'는 속담이 있는데 삼한 봄가뭄을 말합니다. 예전엔 봄가뭄이 심해 모자리를 만둘지 못하는 해도 흔했습니다.
요즘은 농사철이 빨라져 조생종은 벌써 모내기를 합니다. 하우스에서 모를 먼저 키워 이앙기로 하는데 추석 전에 수확해 비싸게 팔립니다.
다음은 못자리용 볍씨와 관련해 전해지는 풍습입니다. 요즘 시절엔 맞지 않지만 흥미로운 것이 많습니다.
볍씨를 담갔던 가마니에 부정을 타지 말라고 솔가지로 덮었다고 하고, 어떤 지방에선 볍씨를 담근 날 항아리에 금줄을 쳐놓고 고사를 지냈답니다. 고사는 모판을 낸 뒤 개구리나 새가 모판을 망치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볍씨가 개구리의 밥과 새의 모이가 돼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되지요.
또 이날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볍씨를 담그면 볍씨가 흘러 도망간다고 해서 이 시간을 피했다고 합니다.
밖에서 '부정한 일'을 당했거나 '부정한 것'을 본 사람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 대문 앞에 불을 놓아 악귀를 몰아낸 뒤 들어오게 하고, 들어와서도 볍씨는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면 싹이 잘 트지 않고, 농사를 망친다는 속신(俗信) 때문입니다.
경북 지방에서는 곡우일에 부부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토신(土神)이 질투를 해 쭉정이 농사를 짓게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라네요. 또 곡우에 무명을 갈거나 물을 맞기도 하는데 이날 물을 맞으면 여름철에 더위를 떨치고 신경통과 위장병이 낫는다고 믿었습니가. 무명은 옛날 사람들의 여름철 옷감입니다.
이들 풍습은 옛날엔 쌀농사가 한해의 가정경제를 좌지우지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정치권과 국가는 남아도는 쌀을 처치하지 못해 양곡관리법을 개정해 다 사주니 마니 하며 티격태격 하고 있습니다. 격세지감이지요.
경북 구미에서는 곡우에 목화씨를 파종하고서는 씨의 명(命)이 질기라고 찰밥을 해서 먹었다고도 합니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이 농사의 본(本)을 보이는 적전(籍田)을 경칩이 지난 뒤 길한 날인 해일(亥日)에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선농제(先農祭)'와 지냈습니다.
서울 동대문구는 4월에 제기동에 있는 선농단(사적 제436호)에서 선농대제를 봉행합니다. 이 행사는 일제강점기에 중단됐다가 지난 1979년 제기동 주민들이 제를 다시 올렸고, 이어 1992년부터 동대문구가 주축이 돼 국가의례 형식으로 제를 올립니다.
◇ 곡우물 먹어
곡우 무렵은 나무에 물이 가장 많이 오르는 시기입니다.
전남, 경남북, 강원에서는 곡우물을 먹으려고 깊은 산이나 명산으로 다녔습니다. 2~3월 고로쇠 물을 받아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곡우물이란 산다래나 자작나무, 박달나무 등에서 나오는 물입니다. 몸에 좋다고 하여 약수로 먹었다고 하네요. 물맛도 산뜻합니다. 곡우 전에 미리 나무에 상처를 내고 통을 달아두고 여러 날 수액(樹液)을 받습니다.
자작나무 수액인 거자수(혹은 거제수)가 많아 나오는 지리산 아래 전남 구례 등지에서는 곡우 때 약수제까지 지냈다고 하군요.
곡우물을 마시지 않으면 뼈가 약해져 힘을 쓸 수 없을 것을 우려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셨다고 합니다. 고된 농사 철을 앞두고 체력을 비축한다는 의미이겠지요. 한편으론 쌀과 보리가 귀했던 시절 이만 때의 보릿고개를 넘기려는 방편으로도 여겨집니다.
요즘의 연구에서도 약효는 대부분 사실로 확인됩니다.
자작나무에는 자일리톨(Xylitol)이란 성분이 들어 있는데, 많이 먹어도 해롭지 않다고 합니다. 당도가 거의 없고 단맛을 내는 감미료로 충치예방 효능도 있어 껌이나 음료수에 사용됩니다.
이는 또 인슐린 분비를 촉진해 당뇨병 환자에게 포도당 대용 에너지 공급용으로 사용하는 천연 재료가 됩니다. 뼈를 튼튼하게 하고 ,노폐물을 제거하고, 항암·항염 효능도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엔 자일리톨 워터라는 음료수까지도 개발되어 편의점에서 판매합니다.
다만 거자수물은 보관이 어렵고 숙성이 빨리 돼 1주일 이상 보관이 어렵답니다. 반면 고로쇠물, 다래수, 가래수 등은 숙성 기간이 다소 늦어 한달 정도 냉장 보관이 가능합니다.
고로쇠물은 경칩 무렵에 나오는 것을 '여자물'이라 해 남자에게 더 좋고, 거자수는 '남자물'이라 해 여자가 더 애용됐답니다.
곡우엔 나물이 지천에서 돋아나 나물 캐는 모습을 보는 시절이기도 합니다. 이때의 나물은 연해 음식을 해먹기에 딱 좋은데 곡우가 지나면 나물이 너무 자라 뻣뻣해지기 때문입니다.
농사꾼 장영란의 자연달력 제철 밥상에서는 '산나물을 시작으로 취, 고사리, 고비, 다래순, 나무 두릅, 엄나무 순, 파드득나물, 찔레 순으로 돋아난다. 왕고들빼기도 올라온다. 청명에 상추, 쑥갓, 엇갈이배추씨를 넉넉히 뿌렸다가 솎아서 먹고 어느 새 자란 부추를 베어 먹고, 양지에는 뽕나무 순 돋아나고 가죽나무순도 올라온다'고 소개합니다.
차(茶) 중에서는 곡우 전에 잎을 따서 만든 차를 '우전차'라고 하는데 곡우 이후에 딴 차(우후차)에 비해 맛이 더 좋다고 합니다.
◇ 서해 바다엔 조기 파시
곡우 때는 전남 흑산도 근처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가 북상해 충남 격렬비열도 부근으로 올라와 파시(波市·바다 생선시장)가 섰습니다. 이때 잡는 조기를 '곡우살이'라고 한다네요.
곡우살이는 살은 적지만 연하고 맛이 있어 서해는 물론 남해 어선도 몰려왔다고 합니다. 요즘은 조기가 덜 잡혀 옛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조금 아랫쪽인 전남 영광의 곡우사리 때에 잡히는 조기는 한식사리, 입하사리 때 잡히는 것보다 알이 더 많이 들어 있고 맛이 좋아 으뜸으로 쳤습니다.
이 무렵 함경남도의 함주군 용흥강에는 숭어떼가 산란을 하기 위해 올라오는데 강변에는 어부가 잡은 생선으로 회(膾)나 찌개를 만들어 술을 마시며 즐겼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강변 사람들은 물고기가 오르는 조만(早晩)을 보고 그해 절기의 이름과 늦음을 예측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조상들은 곡우때 나물과 조기 등의 음식을 즐겨 먹으면서 입맛 떨어진 봄철 건강을 챙겼습니다.
◇ 곡우 속담
'곡우에 모든 곡물들이 잠을 깬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 '곡우에 비가 오면 농사에 좋지 않다', '곡우가 넘어야 조기가 운다'와 같은 농업과 어업에 관련한 다양한 속담이 전해집니다.
'곡우에 비가 오면 농사에 좋지 않다'는 속담은 이날 비가 와야 풍년이 든다는 속담과 반대입니다. 실제 비가 자주 와야 만물이 잘 생장하지만 비가 많이 오면 토사가 흘러들어 샘 구멍을 막아 농사에 쓸 물이 부족해진다고 해석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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