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로 여는 한 주④]'야생 붓꽃'...르위즈 글릭

임지연 승인 2024.03.17 12:16 | 최종 수정 2024.03.17 14:04 의견 0

야생 붓꽃

르위즈 글릭 (Louise Glück, 1943~2023)

1943년 뉴욕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로 활약하며 20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르위즈 글릭(1943~2023)

(영어 원문)

The Wild Iris

At the end of my suffering
there was a door.

Hear me out: that which you call death
I remember.

Overhead, noises, branches of the pine shifting.
Then nothing. The weak sun
flickered over the dry surface.

It is terrible to survive
as consciousness
buried in the dark earth.

Then it was over: that which you fear, being
a soul and unable
to speak, ending abruptly, the stiff earth
bending a little. And what I took to be
birds darting in low shrubs.

You who do not remember
passage from the other world
I tell you I could speak again: whatever
returns from oblivion returns
to find a voice:

from the center of my life came
a great fountain, deep blue
shadows on azure sea water.

(한글 옮김 정은귀, 『야생 붓꽃(시공사)』)

야생 붓꽃

내 고통의 끝자락에

문이 하나 있었어.

내 말 좀 끝까지 들어 봐: 그대가 죽음이라 부르는 걸

나 기억하고 있다고.

머리 위, 소음들, 흔들리는 소나무 가지들,

그리곤 아무 것 없어. 힘없는 태양은

메마른 땅 표면에 어른거리네.

끔찍해, 어두운 대지에 파묻힌

의식으로

살아남는다는 건.

그러고는 끝이 났지: 네가 두려워하는 것, 영혼으로

있으면서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갑자기 끝나고, 딱딱한 대지가

살짝 휘어졌어.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내가 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빠르게 날고.

다른 세상에서 오는 길을

기억하지 못하는 너,

네게 말하네, 나 다시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망각에서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든

목소리를 찾으러 돌아오는 거라고:

내 생명의 한가운데서 거대한

물줄기가 솟아났네, 하늘빛 바닷물에

깊고 푸른 그림자들이.

해설: 서린

시인이자 폴란드문학(외대 박사과정)을 연구하는 서린 씨. 한국계 미국인으로 폴란드에서 9년간 시를 공부한 후 한국에 정착, 한국 현대시를 유럽에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야생 붓꽃처럼 몇 번이나 죽음을 겪는가?

‘나’라는 존재가 몇 번이나 파괴되며, ‘나’라는 말이 입에서 증발하는가?

그리고 그 무음, 그 죽음의 끝자락에, “아…”라는 모음이 목에서, 몸에서 솟구쳐 오를 때, 그 소리가 바다보다 몇배나 더 깊을까, 더 푸를까?

르위즈 글릭 (1943~2024)

독자적 활동으로 어느 문단(文壇)에 속하지도, 시적 유행을 좇지도 않았던 미국 시인.

2020년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축하 전화를 받자, 커피를 먼저 챙기고자 했던 글릭은 수상 소감 연설에서 “난 무명인이야! 넌 누구니?”라며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을 인용했다.

첫 시집 『맏이(Firstborn)』부터 끊임없이 고통과 죽음, 그리고 트라우마와 실패한 관계들에 주목하면서도, 일인칭 단수의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퓰리처상을 안긴 『야생 붓꽃(The Wild Iris)』이나 스웨덴 한림원이 특별히 언급한 『아베르노(Averno)』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글릭의 시적 목소리는 다인칭 대화를 이룬다.

심지어 식물과 신의 관점으로부터 시가 이어진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예언의 상상력과 디킨슨의 꾸밈없는 문체를 결합하며 자신만의 특유한 시적 세계를 아로새겼다.

시집 전권(13권·시공사)이 국내에서 2022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은귀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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