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굴욕...'흔들리는' 삼성 반도체 왕국, 해법은?

임지연 승인 2024.05.25 16:26 | 최종 수정 2024.05.26 08:36 의견 0
서울 서초동 삼성 서초사옥에서 펄럭이는 삼성 깃발. 삼성전자 제공


지난 24일 여의도 금융가의 이목은 온통 삼성전자의 주가 움직임에 쏠렸다.

인공지능(AI) 붐이 일면서 반도체 산업의 핵심 아이템으로 떠오른 HBM(고대역폭 메모리) 납품 이슈가 이날 오전 로이터 통신의 부정적 보도를 계기로 일파만파의 상황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문제 없다며 즉각 반박에 나섰지만, 시장의 불안감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삼성전자의 주가는 전날 대비 3.07% 빠진 7만7,900만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30여 년 넘게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호령해 온 삼성이 외신 보도 한 토막에 휘청거리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일파만파 외신 보도 로이터 통신은 이날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 삼성전자가 미국 반도체 업체 엔비디아에 납품하려는 HBM이 아직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며 발열과 전력 소비 등이 문제가 됐다고 전했다.

로이터는 AI용 GPU(그래픽처리장치)에 쓰이는 4세대 제품 HBM3, 5세대 제품 HBM3E에 문제가 있다며 경쟁사인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더 뒤처질 수 있다는 투자자들의 우려가 나온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는 즉각 입장문을 내고 "다양한 글로벌 파트너들과 HBM 공급을 위한 테스트를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며 반박했다.

삼성전자는 "현재 다수의 업체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지속적으로 기술과 성능을 테스트하고 있다"며 "HBM의 품질과 성능을 철저하게 검증하기 위해 다양한 테스트를 수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HBM이 뭐길래 AI 메모리를 대표하는 HBM은 요즘 반도체 분야에서 가장 핫한 아이템이다. 여러 개의 D램 칩을 TSV(Through Silicon Via, 수직관통전극)로 연결,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고부가가치, 고성능 제품이다.

전체 메모리 반도체시장 매출에서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지만, 어렵고 복잡한 선행 기술 제품으로 가장 기술 집약적 D램이라 할 수 있다.

HBM은 1세대(HBM)-2세대(HBM2)-3세대(HBM2E)-4세대(HBM3)를 거쳐 현재 5세대(HBM3E)까지 개발됐으며, HBM3E는 HBM3의 확장(Extended) 버전이다.

방대한 데이터를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는 생성 AI를 구동하려면 HBM과 같은 고성능 메모리가 반드시 필요해 최근 수요가 급팽창하고 있다. 반도체 업체들간 4세대와 5세대 개발 및 납품을 둘러싼 선두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이유다.

HBM 가운데 가장 진화된 5세대 HBM3E(8단)는 SK하이닉스가 세계 최초로 제품 양산을 시작, 지난 3월부터 엔비디아에 공급하면서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10년인 2013년부터 메모리반도체와 시스템반도체의 융합 성격을 지닌 HBM의 잠재력에 주목, 선도적으로 제품 및 시장을 개척해 왔다.

삼성전자 수원캠퍼스 전경. 삼성전자 제공


뒤늦게 뛰어든 마이크론도 지난 3월 엔비디아와 HBM3E 납품 계약을 체결한 상태다.

한발 뒤진 삼성 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를 수십년간 지켜온 삼성전자는 2010년대 후반 10조~20조를 넘나 드는 영업이익에 만족하며 AI시대로 접어들면서 급변하고 있는 시장 상황에 안이하게 대처해 왔다.

"졸면 죽는다"는 시장 격언을 잊은 결과 다급한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부터 HBM 시장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1분기 실적 발표 때 HBM3E 12단 제품을 2분기 중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서둘러 밝혔다. HBM3E 8단 제품은 이미 초기 양산을 개시했고, 빠르면 2분기 말부터 매출이 발생할 것이라는 전망도 곁들였다.

하지만 이같은 설명에도 시장은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엔비디아향 공급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는 AI구동에 필수적인 GPU 시장에서 글로벌 점유율이 90%가 넘는 절대 강자이다. GPU 성능 향상을 위해 탑재되는 HBM의 성공은 엔비디아 납품 여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부터 엔비디아에 HBM3, 올해에는 HBM3E 공급을 추진 중이지만, 아직까지 샘플 공급을 넘어 실제 양산 공급을 최종 확정짓지 못한 상황이다.

최근 물러난 경계현 전 DS(반도체)부문 사장도 지난 4월 "AI 초기 시장에서는 우리가 승리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더욱이 삼성전자의 HBM 성능은 경쟁사 대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도 일각에서 나온다.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이 HBM3E 생산에 1b D램(10나노급 5세대 D램)을 적용한 반면, 삼성전자는 이보다 한 세대 뒤진 1a D램(10나노급 4세대 D램)을 활용한 것이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승부 아직 끝나지 않아 삼성전자가 HBM사업에서 어려움에 처한 건 사실이지만, 외신보도처럼 HBM3E의 엔비디아향 테스트를 실패로 표현하는 건 적절치 않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삼성전자의 HBM3E 제품. 삼성전자 제공


신규 반도체 칩 공급을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공정 조율과 개선을 거치기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엔비디아의의 필드 테스트(Field test) 결과 일부 결함이 나올수도 있지만 이는 상호 협의를 통해 얼마든지 보완해 갈 수 있는 문제라는 시각이다.

앞으로 상당한 수급난이 예상되는 12단 HBM3E의 제품 테스트는 아직 초기 단계로 봐야 하며, 올 상반기 중 테스트 통과가 가장 좋겠지만, 하반기까지 성능을 개선하면서 테스트를 마칠 여지가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삼성전자가 지난 30여년 간 메모리 공정에서 쌓아올린 노하우와 역량으로 볼 때 판을 뒤엎을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이런 것을 감안해도 늦어도 하반기, 특히 10월까지 가시적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삼성전자가 HBM의 주도권을 완전히 내주면서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는데 많은 전문가들은 동의한다.

한마디로 앞으로 4~5개월이 판을 뒤집을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위기 해법은 "5년, 10년 뒤에 무엇으로 먹고살 것인가를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 땀이 난다.”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신경영 선언을 주창했던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은 삼성이 사상 처음 소니의 시가총액을 제친 2002년 4월 주재한 회의에서도 이렇게 강조했다.

“모든 것이 가장 잘 돌아가는 지금이 가장 큰 위기 상황”이라는 이 회장의 ‘위기 경영론'은 2014년 심근 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이어지면서 삼성의 반도체 '초격차' 리더십을 일구어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상황은 삼성에게 그리 좋지 못했다. 이 회장의 뒤를 이은 이재용 회장도 위기 경영을 강조했지만, 지난 6~7년간 계속된 사법 리스크로 인한 타격이 매우 컸다. 총수의 구속과 100회가 넘는 재판 출석 등으로 삼성이라는 조직은 특유의 도전과 혁신 정신이 퇴색해 갔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게 작금의 삼성 반도체 위기의 뿌리라는 지적도 빠지지 않는다.

삼성전자는 위기 극복을 위해 최근 임원 토요일 출근으로 분위기를 다잡아 나가면서 전례 없는 초강수를 빼들었다. 지난 21일 미래사업기획단장을 맡고 있던 전영현 부회장을 인사철도 아닌데 신임 반도체(DS)부문장으로 위촉, 구원투수 역할을 맡긴 것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삼성이 특유의 '위기 경영'을 통해 다시 한번 조직의 혁신 DNA를 일깨울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며 "앞으로 4~5개월이 다시 선두로 치고 나가느냐, 뒤쳐지느냐의 갈림길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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