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무’의 시인 신경림 씨 88세 일기로 별세

정기홍 승인 2024.05.22 13:26 | 최종 수정 2024.05.26 15:43 의견 0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로 잘 알려진 신경림 시인이 22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8세.

고인은 1970년대 민중문학의 새 지평을 열고 고교 교과서에 시가 실리는 등으로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22일 동국대 문학인들에 따르면 경기 고양시 일산에 있는 국립암센터에서 암 투병하던 신 시인은 이날 오전 영면에 들었다. 의과대 재학 시절부터 고인과 연을 맺어온 서홍관 국립암센터장(시인)이 고인의 임종을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신경림 시인. 문학나루

그의 대표 시집으로 ‘농무’(1975년), ‘가난한 사랑노래’(1988년), ‘낙타’(2008년) 등이 있다.

고인은 1936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충주고와 '문학의 최고 명문' 동국대(영문과)를 졸업했다. 동국대 교정에는 그의 시를 담은 비가 세워져 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56년 '문학예술'지에 '갈대', '묘비' 등의 작품이 추천돼 등단했으며, 1973년에 농민과 서민 등 민중의 한과 고뇌를 담은 첫 시집 '농무'를 펴내면서 주목을 받았다.

신 시인은 이후 '새재'(1979년), '달 넘세'(1985년), '민요기행 1'(1985년), '남한강'(1987년), '가난한 사랑노래'(1988년), '민요기행 2'(1989년), '길'(1990년), '갈대'(1996년),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9년), '낙타'(2008년), '사진관집 이층'(2014년) 등의 시집을 써냈다.

그의 시 '가난한 사랑노래'는 여전히 많은 독자들이 즐겨 찾는 애송시로 꼽힌다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서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필자는 원고를 출판사에 넘길 때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탱크 바퀴 굴러가는 소리'로 썼으나 군부 시절 검열을 의식한 출판사의 권고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고인은 민초들의 슬픔과 한, 굴곡진 삶의 풍경과 애환을 질박하고 친근한 생활 언어로 노래해온 '민중적 서정시인'이었다.

일찍이 문학평론가 최원식 씨는 그를 "우리 시대의 두보(杜甫)"라고 평가했다.

시론과 평론집으로는 '한국 현대시의 이해'(1981),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3), '우리 시의 이해'(1986) 등을 썼다.

생전에 만해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시카다상, 만해대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동국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문인들은 고인과 그의 작품이 한국 현대시와 문단에서 차지하는 높은 위상을 고려해 장례를 주요 문인단체들이 함께하는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를 계획이다.

서 센터장은 “7년 전 대장암에 걸려 치료를 잘 받아 많이 좋아졌었다. 하루 5000보를 걸을만큼 정상적인 활동을 했는데 재발돼 그동안 호스피스 병동에 모셨다”고 전했다.

그는 “선생께서 워낙 깔끔하셔서 남에게 폐가 될까봐 아픈 걸 알리는 걸 굉장히 꺼려하셨다. 병문안 오고 싶어하는 분들은 많았지만 절대 알리지 말라고 해 가족 외에는 거의 오지를 못했다”고 전했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낸 시집은 2014년 출간한 '사진관집 2층'(창비)이다. 창비 측은 미발표작 등을 모아 유고시집을 준비할 계획이다.

빈소는 혜화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이며 도종환 의원이 장례위원장을 맡는다. 발인은 25일 오전 5시 30분, 장지는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 선산이다. 연락처는 신병규(아들) 010-3010-1386.

■신경림 시인의 '농무(農舞)'

농무는 '풍물놀이에 맞춰 추는 춤'이다. 농사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고, 농촌 공동체를 하나로 만들어주는 전통 의식이다. 이 시는 산업화, 근대화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농민들의 삶을 신명난 춤사위를 통해 극복하는 것을 그리고 있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들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것은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따위야

아예 여편네이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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