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서울 지하철 5호선 열차에서 60대 남성이 기름통을 들고 들어와 불을 질러 승객 400여 명이 지하 터널로 긴급 대피했다. 다행히 20여 명 정도만 연기 흡입, 골절 등 부상을 입었지만 하마터면 큰 재앙이 될뻔했다. 시민들은 '제2의 대구참사'를 떠올렸다.

대구지하철 참사는 지난 2003년 2월 18일 방화로 발생해 사망 192명, 실종 21명, 부상 151명의 끔직한 피해를 냈다.

대구 참사 때와 달랐던 것을 짚어본다. 5호선 방화 때는 대구 참사 당시와 달리 ▲대구 참사 이후의 지하철 안전 대책 강화 ▲기관사와 승객들의 침착한 대처 등이 돋보였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지난달 31일 서울지하철 5호선 객차 안 방화로 승객들이 지하 터널을 통해 대피하고 있다. 서울 영등포소방서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따르면, 60대 방화범 A 씨는 지난 5월 31일 오전 8시 43분 지하철 5호선 열차에서 미리 준비한 인화성 물질과 라이터형 토치로 불을 질렀다.

A 씨는 5호선 여의나루역에서 마포역으로 향하는 열차 네 번째 칸에서 준비했던 인화 물질을 바닥과 벗은 옷 등에 뿌린 뒤 라이터형 토치로 불을 지폈다.

하지만 A 씨가 의도했던대로 화재는 크게 번지지 않았다.

불이 번지는 것을 막은 결정적 것은 열차에 사용된 불연재(不燃材) 자재였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서울 지하철은 대구 지하철 참사 후인 2003년 9월부터 전동차 골격과 바닥, 내장재 등을 스테인리스 등으로 모두 바꾸었다.

스테인리스는 800도의 고온에서도 형태를 유지하고 연소하지 않는다.

김진철 마포소방서 소방행정과장은 31일 현장 브리핑에서 “객차 내 대부분의 내장재가 불연재여서 쓰레기만 일부 불에 탔다”고 말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 땐 우레탄폼, 폴리우레탄 등 가연성(可燃性) 소재가 열차 내부에 사용돼 불길이 순식간에 전동차 전체로 번졌다. 객차 전체가 약 2분 만에 불길에 휩싸여 손 쓸 틈도 없이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기관사와 승객들의 신속한 대처도 빛났다.

객차 안에서 불이 나자 놀란 승객들은 인접한 객차로 이동한 뒤 비상호출장치로 기관사에게 곧바로 상황을 알렸다.

기관사 B 씨(28년차)가 신고를 받은 뒤 열차 내 CCTV를 확인,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인지했다. 그는 열차를 멈추고 곧바로 불이 난 네 번째 열차 칸으로 달렸다.

전동차 내에 비상호출장치는 객차 한 칸의 양쪽 끝 출입문 옆에 1개씩 설치돼 있다. 이 장치를 누르면 기관사와 통화할 수 있고, 운전실 내 CCTV 화면은 호출을 요청한 칸으로 전환된다. 기관사 B 씨가 발빠르게 상황을 인지할 수 있던 이유다.

B 씨와 일부 승객은 벽면에 비치된 소화기를 꺼내 화재 진압에 나섰다.

기관사 B 씨는 화재 진압 당시 연기를 마셔 구토 등 증상을 보였지만 열차를 대피선이 있는 애오개역까지 운행하고서 인근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은 뒤 귀가했다.

일부 승객은 의자 밑에 있는 비상 개폐장치를 찾아 열차를 마포역에서 약 300m 떨어진 구간에서 세웠다. 승객 400여 명은 터널을 통해 인근 역사 대합실 등으로 긴급대피 했다.

지하철 비상 개폐장치는 화재 등 비상시에 승객이 열차 출입문을 열고 나올 수 있도록 설치된 장치다. 이 장치가 작동되면 열차는 곧바로 자동으로 멈춘다. 평소 눈여겨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비상 개폐장치로 지하철 출입문이 열리자 승객들이 서로 대피를 도왔다.

당시 119에 최초 신고를 한 오창근(29) 씨는 “열차 문을 열고 어르신, 여성 등이 약 1.5m 아래 있는 터널로 뛰어내리는 것을 다른 남성들과 돕고 대피했다”고 말했다.

이번 방화를 큰 사고 없이 끝낸 것은 서울시는 열차의 내장재를 불연재로 바꾸고, 승객들은 평소 출입문을 여는 법 등을 숙지하고 있었던 덕분이다.

물적, 인적 비상 대처 시스템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평소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도 방화에 대비한 소화 훈련 등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웠다.

마포소방서 김 과장은 현장 브리핑에서 “소방관들이 열차에 진입했을 땐 상당수 승객이 대피했고,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 기관사와 승객들이 소화기로 자체 진화해 따로 진화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고 했다.

한편 영등포경찰서는 1일 A 씨에 대해 현존전차방화치상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A 씨는 경찰 조사에서 “이혼 소송 결과에 불만이 있어 지하철에 불을 질렀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A 씨는 현장에서 들것에 실려 여의나루역 역사로 나오다, 손에 그을림이 많은 것을 발견한 경찰의 추궁에 범행을 시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