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란도-무쏘의 아버지' 김석원 쌍용그룹 전 회장 78세로 별세···쌍용 한때 '재계 6위'로 성장

정기홍 기자 승인 2023.08.26 14:55 | 최종 수정 2023.08.26 17:43 의견 0

쌍용그룹을 한때 재계 6위까지 키웠던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이 26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쌍용그룹 산하 성곡언론문화재단은 이날 “김석원 전 회장이 오늘 새벽 3시쯤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성곡(省谷)은 김 전 회장의 부친인 김성곤 쌍용 창업주의 호다.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쌍용그룹을 한때 재계 6위 규모로 키웠다. 성곡언론문화재단

대구 출신인 김 전 회장은 명문 서울고를 졸업한 뒤 1966년 미국 브랜다이스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가 미국 프랭클린 피어스대를 졸업했다.

미국 유학 중이던 1970년 귀국해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고, 베트남전에도 수색중대원으로 10개월간 참전했다.

이후 1975년 2월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가 별세하자 30세의 젊은 나이에 쌍용그룹 회장에 취임해 사세를 확장하면서 제계 6위까지 끌어올렸다.

쌍용그룹의 모체는 1939년 창업주가 대구에서 시작한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다. 이후 1962년 시멘트업인 쌍용양회를 설립하며 사명을 ‘쌍용’으로 사용했다.

김 전 회장은 회장 취임 후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기업 규모를 키웠다.

1976년 쌍용중공업과 쌍용정유, 1977년 쌍용건설, 1978년 쌍용엔지니어링을 설립했고 1984년 쌍용투자증권, 1985년 쌍용경제연구소, 1988년 쌍용투자자문 등을 세워 사업을 다각화 했다.

특히 1973년 시작해 7년만에 쌍용양회 강원 동해공장을 연간 560만t 규모로 증설했고, 1976년 이란 국영석유공사와 합작해 쌍용정유를 설립한 뒤 1980년엔 지분을 모두 인수해 쌍용정유를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1983년엔 효성증권도 인수했다.

특히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 1986년 동아자동차를 인수했다.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써넣어 삼성을 제치고 경영권을 확보했다.

이후 동아자동차는 1988년 사명을 쌍용자동차로 바꿨고 쌍용차는 그해 국내 스포츠유틸리티차(SUV) 대중화를 이끈 ‘코란도 훼미리’를 출시하며 독보적 위치를 다졌다. '코란도와 무쏘의 아버지'로 불렸다. 김 전 회장은 회장 시절 세단이 아닌 코란도를 이용했을 정도로 애정이 깊었다.

사세 확장에 힘입어 쌍용그룹은 한때 재계 순위 6위로 자리를 잡았다. 지난 1995년 4월 1일 기준 쌍용그룹의 총자산은 10조 9540억 원이었다. 김 전 회장은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삼미그룹 김현철 회장과 함께 ‘재계 3김’으로 불리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쌍용자동차가 존폐 위기에 놓였을 무렵 정치에 발을 담근 게 화근이었다.

김 전 회장은 “정치를 하지 말라”던 아버지 유언을 어기고 1996년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달성 신한국당 후호보 출마해 당선됐고, 그룹 회장직은 동생인 김석준 전 회장에게 넘겼다.

김성곤 창업주는 대구 달성에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발을 들여 제6∼8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을 지냈고, 한때 '공화당 4인방'으로 불렸다. 하지만 1971년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킨 '10·2 항명 파동'의 주동 인물로 지목돼 중징계를 받고 정계를 떠났다.

쌍용그룹은 이후 현대차, 대우차, 기아차의 부상으로 자동차 사업 적자가 누적되고 이어 터진 IMF 외환위기(1998년)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자동차 애호가'인 김 전 회장은 쌍용차 경영이 어려워졌지만 포기하지 못한 채 수조 원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막대한 부채만 남기고 말았다. 결국 쌍용차는 1998년 1월 대우그룹에 매각됐다.

그룹 여건이 어렵게 되자 김 전 회장은 1998년 2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회사로 돌아왔다. 김 전 회장의 사퇴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김 전 회장이 돌아왔지만 회사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쌍용차에 무리하게 투자한 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왔고, 경영 실적이 급속도로 악화하며 쌍용그룹은 1990년대 말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쌍용투자증권은 1998년 미국 H&Q AP에, 쌍용정유는 1999년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사 펀드에 팔렸다. 쌍용중공업은 2000년에 한누리투자증권 컨소시엄에, 쌍용화재는 2002년 중앙제지에, 용평리조트는 2003년 세계일보에 매각됐다.

김 전 회장은 우리나라 동계스포츠와 레저산업 발전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평을 받는다. 스키 불모지로 ‘리프트’란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에 1974년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에 용평스키장을 만들고 리조트로 개발했다. 한국의 동계스포츠와 레저산업 발전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우리도 산이 있고, 겨울이 있고, 눈이 있는데 왜 안 되느냐, 한번 만들어보자는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1982년에는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로 선출돼 스카우트 운동에 헌신했다. 특히 1991년 강원 고성에서 개최된 제17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를 유치하고 성공적으로 마무리 했다.

그는 대회 유치 후 “설악산 야영장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방문해 온갖 변수를 검토했다”고 했다. 2000년부터는 3년간 세계스카우트지원재단(WSF) 의장직도 맡았다.

김 전 회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직후 개최된 세계청소년캠프 본부장을 맡아 청소년 국제교류에도 기여했다.

유가족에는 부인 박문순 씨, 아들 김지용(학교법인 국민학원 이사장)·김지명(JJ푸드 시스템 대표)·김지태(태아산업㈜ 부사장) 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 특1호실. 발인은 29일 오전 7시 20분. 장지는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용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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